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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Writing

추모소설 - 1.빈대떡은 빈대로 만든다?

by Gomuband 2010.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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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세 편의 소설은...
제가 바랐던 그분의 소박한 모습을 상상하며 작년 6월에 쓴 글입니다.
지금은 온전하고 편안하게 웃고 계시기를 빌며
1주기까지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겠습니다.
당신이 계신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1. 빈대떡은 빈대로 만든다?

술이 올랐다.
자정이 가까웠지만 집에 들어가고픈 생각이 없었다.
지하철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지하철 시간표를 보았다.
방화로 들어가는 막차가 종로3가역에서는 12시 15분.
첫차는 5시 45분.
반대편 출구로 다시 나왔다.
어깨에 멘 기타가 거추장스러웠다.

가까운 곳에 자주 가는 빈대떡집이 있었다.
10시 반이면 손님을 내보내던 곳인데 오늘은 불이 켜져 있었다.
금연석 쪽에 술집식구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가게의 왼쪽은 흡연석이었다.
구석에 두 사람이 남아있었다.
아줌마가 문을 열고 아는 체를 했다.
  “왠 일이시오? 다 늦게?”
  “아직 안 끝났어요?...오늘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그냥 식구들끼리 노는 거지.”
  “그럼 저도 딱 한 병만 마시고 갈게요.”
 
TV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아가씨가 서울막걸리를 따놓고 갔다.
아가씨는 작년에 새로 왔다.
도톰하고 적당히 되바라진...술꾼들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였다.
항상 껌을 씹으며 눈높이보다 조금 위쪽을 보며 일했다.
아줌마들만 있던 빈대떡집에 아가씨가 보이자
술꾼들의 눈길은 혀를 닮아갔다.
아가씨는 무관심이란 철솔로 느끼한 시선을 털어내곤 했다.

아줌마가 작은 접시에 전을 몇 개 담아왔다.
  “철판 불을 꺼버려서 빈대떡은 못 드리네.”
설거지 물기를 바닥에 뿌려내고 한 잔 가득 채웠다.
단숨에 잔을 비웠다.
답답했던 속이 한결 나아졌다.

고창집은 다 좋은데 환기가 엉망이었다.
고기 굽는 연기와 담배연기가 어우러져 허파를 죄어왔다.
문을 열어 놓자니 몸이 춥고, 닫고 있자니 숨이 막히고...
TV에서는 연신 대통령 탄핵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지겨웠다.
  “나...육사 안간 거 정말 후회된다.”
  “갔으면 어쩌려고?”
  “부대 끌고 나와서 다 엎어버린다.”   
  “니가 전두환이냐?”
경수가 잔을 비웠다.
  “가자...많이 마셨다.”
일어나자는 경수의 소리에 아줌마가 볼펜을 잡았다.
  “생전 안취하던 양반이 오늘 뭔 일 있으까? 술 많이 되셨네.”
경수는 좀 걷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너 또 인사동가지...”
  “돈이 어딨냐?”
경수는 인사동 쪽으로 갔다.

경수가 좋아하는 여자는 인사동에서 카페를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길고, 다리도 길고, 손가락도 길죽한 여자였다.
글쟁이 경수는 뒷주머니가 불룩한 날만 인사동으로 갔다.
길고 긴 여자 주변엔 항상 화가들이 들끓었다.
화가들이 선물한 그 여자의 초상화가 카페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경수도 시를 한 편 지어 선물했다.
경수의 시는 카페 화장실문 안쪽에 아직도 붙어있다고 했다.
  ‘뭐든지 긴 게 좋아...당신이 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만 빼고...’

볼륨을 줄여 놓은 벙어리TV에 마감뉴스 자막이 흘러갔다.
화장실로 가다 옆 칸을 보니 못 보던 식구가 보였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이였다.
반듯한 코 위에 걸린 검은 뿔테 안경이 흰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의자 옆으로 튀어나온 커다란 검은 구두가 바쁘게 반짝였다.
아가씨가 주방에서 과일쟁반을 들고 나왔다.
  “저 친구는 누구에요?”
  “사장님 아들이래요.”
아가씨가 아들 옆에 앉아 껌을 씹으며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빈대떡집 아들은 재작년에 유학을 갔다.
빈대떡집이나 하라는 주인아저씨의 명을 어기고 유산까지 미리 챙겨 훌훌 떠났다고 했다.
주인아저씨는 아들 생각만 하면 머리가 한웅큼씩 빠진다고 했다.
 
담뱃불을 붙이려고 주머니를 뒤지니 라이터가 없었다.
  ‘경수가 집어갔구나...’
경수는 눈에 보이는 라이터는 다 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침에 주머니를 뒤지면 양쪽에서 네 다섯 개가 나오는 건 보통이라고 했다.
라이터를 빌리려고 주방 쪽으로 가다가 사내들이 앉은 옆 테이블을 슬쩍 쳐다봤다.
재떨이에 꽁초가 있었다.
  “라이터 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 붙은 라이터가 휙 올라왔다.
불을 붙이고 목례를 했다.
반백의 멋진 얼굴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작년 대통령 선거 때, 나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다.
아니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음악하면서 사는 삶과 정치는 얽힌 게 없었다.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30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어려운 일이 생겼다.
잘 나가던 건설업체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해보려던 아내의 꿈이 무너졌었다.
짓지도 않은 아파트에 덜컥 중도금을 넘겨준 은행은 나몰라라로 일관했다.
2년을 기다리다 중도금 이자로만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물어내고 반지하방으로 내려앉았다.
아파트 건설사 회장은 정치권에 뇌물을 준 죄로 감옥에 갔다.
내 아파트를 지을 돈도 정치권에 뇌물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맛있던 멸치가 꼴도 보기 싫었다.

다시 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또 불을 빌리기가 미안하여 주방 쪽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같이 앉으시지요.”
나와 등을 마주하고 앉아있던 사내의 목소리였다.
반백의 사내가 일어나 옆자리의 의자를 당겨놓았다.
아줌마가 건너와서 내 자리의 술과 잔을 옮겨주었다.
사내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아줌마가 미소를 흘리고 간판불을 껐다.
사내는 뒷문을 열고 화장실로 갔다.
반백의 사내가 라이터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아주 오래 된 휘발유 라이터였다.
  “어디서 뵌 것 같아요.”
  “남들이 많이 그럽니다.”
  “탈렌트시죠? 맞죠?”
반백의 사내는 낮게 웃으며 가라앉은 막걸리 통을 흔들었다.

사내가 돌아왔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탁자에 걸쳐놓고 사내에게 술을 권했다.
  “한 잔 받으시지요.”
막걸리 잔을 내미는 사내의 손에서 달콤한 비누냄새가 났다.
한 잔 가득 따르고 사내의 술을 받았다.
  “반갑습니다.”
건배를 하고 술을 넘기며 슬쩍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목으로 넘어가던 술이 놀라움에 부딪혔다.
술잔 너머에서 빙그레 웃으며 막걸리를 넘기는 사내...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술기운이 싹 가셨다.
반백의 사내가 내 무릎을 가만히 짚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 분이십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담배 남았으면 하나 주시겠습니까?”
주머니를 급하게 뒤졌다.
담배가 없었다.
  “이거 맞지요?”
사내의 손에 내 담뱃갑이 들려있었다.
아줌마가 상을 옮기면서 같이 들어다 놓은 것이었다.
  “하나 피워도 될까요?.”
난 얼른 라이터를 켜서 사내 앞으로 내밀었다.
사내가 내 손을 가볍게 감싸고 불을 붙였다.
따뜻했다.
따뜻한 손이었다.
  “박하군요.”
  “네...”
  “시원하고 좋습니다.”
  “네...”
반백의 사내도 내 담배를 하나 붙였다.
사내들은 계속 연기를 뿜어냈다.

  “실망 많이 하셨지요?”
  “???”
나는 사내의 말뜻을 몰라서 반백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탄핵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그거요...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렇습니까? 화가 나시던가요”
  “네...화가 났습니다.”
  “제가 많이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사내는 담배를 끄고 남은 빈대떡을 세 토막으로 갈랐다.
  “이 집 빈대떡은 이렇게 먹으면 맛있습니다.”
사내는 빈대떡 위에 토마토 캐첩을 뿌린 썬 양배추를 조금 올리고 양파조각을 하나씩 얹었다.
바싹 지져낸 빈대떡 안의 돼지고기와 양배추, 양파가 섞이니 햄버거 비슷한 맛이 났다.
사내는 막걸리를 한 병 더 시켰다.
  “빈대떡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요?”
  “빈(貧)자를 위한 커다란(大) 떡...아닐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큰 떡이라...해몽 좋습니다!”
  “둘 다 기름을 두르고 부쳐내는데 왜 파전은 전이라고 부르고, 빈대떡은 떡이라고 부를까요?”
  “빈대전은 좀 이상한대요.”
  “달걀을 묻혀 부친 것을 전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그것도 맞는 것 같네요.”
  “밀전병은 떡일까요? 부침갤까요? 과자일까요?”
  “성경에 오병이어란 말이 나오지요. 병(餠) 이란 글자는 떡이 맞는데, 서양에 우리 같은 떡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밀 같은 곡식을 갈아 반죽을 하여 화덕에서 구어 낸 음식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도 중동이나 인도에선 그런 음식을 만들어 먹거든요. 피자도 그런 종류 같고요. 성경을 번역한 동양 사람들이 떡이라고 표현한 것 같네요.”
  “빈대떡에 빈대를 넣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겠지요.”
  “열차집도 가보셨나요?”
  “어리굴젓을 기본안주로 주는 집 말씀이죠? 피맛골에 있는...”
  “네, 항상 손님이 많지요. 이 집처럼...”
  “막걸리집은 좀 시끄러워서 피곤하지만, 또 그게 매력이지요. 푸짐하게 마시고 거창하게 떠들어대고...”
  “하하...열차집도 가보셨으니 고갈비집도 아시겠네요. 인사동 입구에 있는...”
  “그 집은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한 사람당 막걸리 두 되만 판다는 집이죠?”
  “네, 하지만 나갔다 들어오면 또 두 되 마실 수 있습니다.”
  “그래요? 재미있군요. 다음에 한 번 같이 가십시다.”

빈대떡집 식구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고 옆 칸의 불이 꺼졌다.
아줌마가 건너와서 빈 막걸리 병을 가져갔다.
  “이제 마치시나 봅니다.”
  “조금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우린 대답대신 잔을 맞대고 건배를 했다.
반백의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
  “반가웠습니다. 화 많이 내면 건강에 해롭답니다.”
  “네...”
  “아까 벽에 세워 놓은 게 기타 맞습니까?”
  “네. 통기탑니다.”
  “기타 치시나요?”
  “네.”
  “한 번 봐도 될까요?”
기타를 꺼내어 사내에게 안겨드렸다.
사내는 찬찬히 기타를 들여가 보다가 Am 코드를 잡고 줄을 긁었다.
TV에서 사내의 기타 치는 모습을 보았었다.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도 보았었다.
난 기타 치는 사내가 대통령이 된 게 자랑스러웠었다.

반백의 사내가 돌아왔다.
  “다음에 만나면 꼭 한 곡 연주 부탁합니다.”
아줌마가 택시가 왔다고 기별을 했다.
반백의 사내가 술값 계산을 했다.
  “제 것은 제가...”
  “괜찮습니다. 다음에 한 잔 사세요.”
빈대떡집 밖에 택시가 한 대, 경차가 한 대 서있었다.
  “늦었으니 택시 타고가세요.”
  “고맙습니다.”
  “명함 받아놓으시고요.”
반백의 사내에게 한 장, 대통령께 한 장 드렸다.
  “고무밴드...이름 좋습니다!”
우린 어린 아이들처럼 웃었다.
헤어지기 전에 우린 담배를 하나씩 더 피웠다.
담배연기가 구름이 되어 북악에 동그랗게 걸렸다.
서울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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