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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Writing

오징어와 춤을... 5

by Gomuband 2010.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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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兄은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채플린 영화에 나오는 좁은 홀태바지를 입고 표범무늬 망토를 두른 모습이 마술쇼에 나오는 후디니 같았다.
고무兄은 외출할 때마다 매번 다른 변장을 했다.
지난번엔 돈키호테로 분장했다가 투구가 벗겨지지 않아 연구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한참 애를 먹은 일도 있었는데, 그날 나는 산초로 분장했다가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 
본부 지하 구 층의 분장실엔 고무兄이 모아 놓은 갖가지 분장 도구가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실물 크기 밀랍인형과 그들이 입었던 의상, 소도구, 가발, 심지어 속옷까지...
고무兄은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에 나왔던 의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었고,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건 배우의 집에 도둑을 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의상이 본부에 도착하면 연구원들이 만들어준 인공 피부를 뒤집어쓰고 영화에 나오는 인물인 양 촬영지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나는 고무兄이 여자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몸매에 샤론 스똥의 스커트를 입으려고 애쓰다 화가 나면 아무 데나 총질을 해댔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by moviment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아니 변장을 하시려면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복장을 하셔야죠..."
  "잔소리 말고 이리 와서 구두끈이나 좀 매라."
  “변장인지...분장인지....그래도 요즘은 가끔 사람들이 진짜 영화배운 줄 알기도 해요.”
  “그러냐? 끽끽...”
여태까지 혼자 낑낑대며 구두끈을 묶으려 했는지 고무兄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배 나온 사람은 세 가지가 불편하다. 발톱을 깎을 수 없고, 구두끈도 못 매고, 오줌 누고 자기 거시기 볼 수도 없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로봇 가물치에서 나온 데이터가 좀 이상하더구나... 왕 박사를 만나봐야겠다."
  "각하는 형님이 로봇 가물치 푼 것을 모르고 계시지요?"
  "각하는 로봇 물고기가 아직도 일을 잘 하고 있는 줄 알고 계시다."
고무兄의 구두는 일천구백구십 년에 지금은 슬럼가로 변해버린 명동의 칠성파 구두점에서 맞춘 것이라고 했다.
송송 뚫린 작은 구멍이 스페이드 모양을 이룬 클래식 스타일의 검은 구두.
앞뒤를 금속으로 처리하고 바닥엔 백 년이 지나도 닳지 않을 파렴치 가죽을 대 놓아 거의 일 세기를 신어도 새 구두처럼 멀쩡했다.
고무兄이 내 옷소매를 슬쩍 끌어다 구두코를 닦았다.
씁쓸한 내 얼굴이 구두코에 반짝였다.
  "풋! 또 내 구두가 탐나느냐? 이번 일 잘 마치면 네게 주련다."

Michael's Shoes Set
Michael's Shoes Set by mstephens7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고무兄을 온종일 기타나 치면서 매일 술주정이나 해대는 팔자 좋은 인생으로만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은 고무兄의 변장한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고무兄이 분장하고 외출할 때는 지하 비밀통로로 본부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뽕제산 기슭의 공원 주차장으로 나가는 통로로 나가신단다.
본부를 나서기 전에 고무兄은 여섯 개의 가방을 챙겼다.
  "너는 이걸 들고 나는 이걸 들고..."
나는 양손에 커다란 가방을 두 개씩 들었다.
고무兄은 제일 작은 가방 하나만 살짝 들고 먼저 계단을 올랐다.
  "하나가 남는데요..."
  "입으로 물고 와라!"

The way out? (from Hell)
The way out? (from Hell) by Giampaolo Macori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통로 끝에는 지상으로 나가는 사다리가 있고, 사다리 위까지 올라 커다란 해치를 열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 해치는 일천구백칠십 년 독도해역에서 왜구들과 한판 붙었던 동해해전을 몰래 정탐하다 좌초한 미쿡 잠수함에서 동네 고물상 최씨가 떼어온 것인데,  참전 기념품 삼는다고 집에 모셔놓은 것을 고무兄이 군용품 절도죄로 평생 감옥에 쳐넣겠다는 협박을 하여 빼앗아 달아 놓은 것이었다.
해치를 열기 전에 고무兄이 잠망경을 올렸다.
  "야! 이거 왜 안 올라가냐? 니가 고장 낸 거 아냐?"
  "잠깐 내려와 보세요. 제가 볼게요."
뭐든지 고장 나면 전부 내 탓이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잠망경은 올라가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른 다른 통로로 빠져나와 해치 위로 가보았다.
해치 위엔 굵은 참나무들이 차곡차곡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런 제기랄...'
나는 다시 지하로 내려가 고무兄을 다른 통로로 모시고 나왔다.
  "가을에 절망근로병들이 산에 있는 나무들을 홀랑 베어내더니 여기에 쌓아놨네요.'
  "아니 나무를 베어냈으면 치워야지...그냥 놔두면 해충들이 여기서 월동을 하잖아! 너라도 치워라."
이걸 혼자 언제 다 치우냐?...으휴~썩을 눔들...

Submarine Force Museum, submarine hatches USS Nautilus
Submarine Force Museum, submarine hatches USS Nautilus by divemasterking2000 저작자 표시

고무兄은 통로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고 전기차 대신 제트엔진차를 타고 나가자고 했다.
기름을 쓰는 자동차는 공해를 유발하고 연료가 많이 들어 생산이 중단된 지 오래지만 고무兄은 요란한 제트엔진 소리를 내면서 버젓이 타고 다녔다.
  "지난번에도 경찰헬기가 따라붙어서 피곤했잖아요. 그냥 전기차 타고 나가시죠?"
  "약속시간까지 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갈래? 순간이동? 벨트 매라."
고무兄은 혼자만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었다.
  "헬멧은 왜 쓰세요? 차 안에서...ㅋ"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고무兄은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조심하세요! 앞에 차옵니다."
고무兄은 빙긋 웃더니 헬멧의 보호안경을 내리고 엑셀을 힘차게 밟았다.
  "꽉 잡아라~이륙한다아~!!!"
마주 오는 차와 부딪히기 직전에 고무兄의 제트기(?)는 사뿐히 날아올랐다.
자동차에 탔던 사람들이 혼이 빠진 얼굴로 우릴 쳐다보고있었다.
고무兄은 차를 자동조정모드로 놓고 좌석에서 일어섰다.
표범무늬 망토가 멋지게 휘날렸다.
  "형님! 드디어 개발에 성공하셨군요!"
  "카이수투 애들이 좀 도와줬다."
고무兄의 제트기는 뽕제산을 한 바퀴 돌고 관악으로 기수를 돌렸다.
Are there cars in heaven?
Are there cars in heaven? by eqqman 저작자 표시비영리

고무兄의 제트엔진차는 보람에 공원에 전시된 공군 연습기에서 뜯어온 엔진으로 조립한 것이라 항상 불안한 작동을 하여 함께 탄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곤 했다.
항공유를 넣어야 할 엔진에 휘발유와 첨가제를 섞은 연료를 넣어 타고 다녔으니 엔진에서 내뿜는 소음과 매연이 심해, 교차로를 지날 때마다 경찰차가 몇 대씩 따라붙으며 차를 세우라고 악을 썼지만 그 누구도 고무兄의 제트엔진차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무兄도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제트엔진을 달고 땅 위도 달리고 하늘도 날고 싶은데  항공유를 구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부의 비밀창고에 비축한 휘발유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는 요즘은 거의 첨가제만 넣고 다니는 통에 힘 못쓰는 엔진을 보는 고무兄의 얼굴도 점점 침울해지고 있었다.
지구에 남은 석유매장량으론 앞으로 오십 년정도 버틸 수 있다는 보고가 나온 이천 오십년.
산유국이 원유생산량을 반의반으로 확 줄이자 각하께서는 휘발유와 항공유의 일반 유통을 엄격히 금지하고 군용으로만 적은 량을 수입한다고 새로운 법을 공포했다.
이후, 모든 교통수단은 휘발유를 쓰지 않는 전기차로 급격히 대체되었고 전세계는 오래 쓰는 배터리를 개발하느라 혈안이 되어 기술이 뛰어난 우리나라 재생빠떼루 기술자들은 금값에 세계 곳곳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원자력엔진을 단 항공기가 미쿡에서 이미 개발되었지만 이륙할 때는 항공유를 사용해야했고, 자주 추락하는 통에 제주도를 오가는 민간항공사도 예전의 제트여객기로 하루에 한 번만 왕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휘발유가 귀해지자 고무兄도 가끔 미쿤부대 가지노에 놀러 갈 때 비닐호스와 석유통을 가져가 근처에 있는 미쿤작전차량의 휘발유를 몽땅 빼내어 오곤 했다.
물론 호스를 빨아 기름을 훔치는 일은 내 담당이었지만...

Hughes McDonnell Douglas Boeing AH-64 Apache
Hughes McDonnell Douglas Boeing AH-64 Apache by E-Mans av8pix.com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항공유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김포콩항으로 가는 송유관을 찾았다."
  "크허~그럼 송유관을..."
뚫으셨어요?~라는 말을 하려는데 사이드미러에 아팟지 헬기가 보였다.
  "형님! 헬기가 따라붙었어요"
  "나도 안다. 이눔아...꽉 잡아!"
고무兄은 급격하게 위로 치솟아 뒤로 원을 그리며 헬기 뒤에 붙었다.
갑작스런 우리의 묘기에 헬기 조종사가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헬기에서 경고방송이 나왔다.
  "여기는 비행금지구역이다! 즉시 기수를 돌려라!"
고무兄이 마이크를 꺼내 즉각 응수했다.
  "난 자동차를 타고 있다. 단속하고 싶으면 교통경찰을 불러와라! ...ㅋㅋ"
고무兄은 헬기 창문에 나란히 차를 대고 감자를 하나 먹인 다음 속도를 올려 하늘로 치솟았다.
아팟지 헬기가 콩알만 하게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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